테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 宏)는 1927년 1월 28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테시가하라 소후는 일본 전통 꽃꽂이 예술인 이케바나의 소게츠류(草月流)를 창시한 인물로, 테시가하라는 예술과 창조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어릴 적부터 그는 꽃과 자연, 미술에 강한 흥미를 보였으며, 도쿄예술대학에서는 회화를 전공하며 시각 예술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1950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순수 예술에 머무르지 않고 조각, 설치미술, 무대 디자인, 영상 등 다양한 표현 매체에 관심을 보였고, 곧바로 예술과 영화의 경계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53년에는 다큐멘터리 연출로 영화계에 데뷔하며 시청각적 감수성과 철학적 질문을 결합한 작업을 시작했다. 테시가하라는 1958년 소게츠 아트 센터의 초대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아방가르드 영화, 실험적 무용, 현대 음악을 통합한 융합예술을 선도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 사회의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공이라는 대립적 가치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통해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과 예술적 성향은 이후 그의 영화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를 단순한 영화감독이 아니라 현대 일본 예술의 전위적 사상가로 만들었다.
테시가하라 히로시는 1960년대 일본 영화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감독으로, 작가 아베 코보와의 협업을 통해 실존주의, 인간 심리, 존재의 불안이라는 주제를 영상미와 결합시킨 대표적인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의 첫 장편영화인 『함정』(1962)은 인간의 고립과 사회적 부조리를 다룬 작품으로, 아베 코보의 각본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테시가하라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시각화한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이어 발표한 『모래의 여자』(1964)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모래 구덩이 안에서 삶을 반복하는 남녀의 존재론적 고뇌와 감정의 이면을 포착한 걸작으로, 테시가하라의 연출력과 아베의 문학성이 완벽히 융합된 결과물이다. 『타인의 얼굴』(1966)은 화상 사고로 얼굴을 잃은 남자가 새로운 얼굴로 삶을 재구성하려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과 사회적 자아의 경계를 탐구한 작품이며, 『사람을 지우는 소리』(1968)는 더욱 실험적인 형식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이후 『안토니오 가우디』(1984)는 건축가 가우디의 예술 세계를 영상으로 형상화한 시적 다큐멘터리로, 테시가하라의 영상미와 조형 감각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마지막 장편 『리큐』(1989)는 센노 리큐의 삶을 통해 일본 미학과 권력의 충돌을 탐구한 역사영화로, 일본 전통예술과 철학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역작으로 꼽힌다.
테시가하라 히로시는 1980년대 이후 영화 연출 활동을 다소 줄이고, 본격적으로 꽃꽂이 예술가로서의 활동에 집중했다. 1980년 아버지 테시가하라 소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소게츠류 제3대 이모토(家元)로 취임해 이케바나 예술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추진했다. 그는 전통 꽃꽂이를 현대 미술과 융합시키는 작업을 지속하며, 대형 전시회와 퍼포먼스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조형적으로 탐구했다. 특히 대나무를 사용한 대형 설치미술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베니스 비엔날레,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전시장에 초청되며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테시가하라는 꽃, 공간, 음악, 영상이 결합된 복합 예술을 선보이며,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의 작품은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도 주목받았다. 1990년대에는 오페라 연출과 무용 연출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 활동 반경을 넓혔으며, 동서양 예술의 통합적 표현이라는 목표를 실현했다. 그는 2001년 4월 14일, 백혈병으로 별세했으며, 그의 사망은 일본 예술계에 큰 상실로 기록되었다. 이후에도 일본과 유럽에서는 테시가하라 회고전과 전시가 꾸준히 이어지며 그의 예술은 지속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의 삶과 예술 세계는 단순한 영화 연출의 경지를 넘어, 20세기 일본 현대 예술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다.